입력 : 2015.05.27 15:57

 


‘ 다음 사진 중에서 좋은 프린트를 고르시오. ’


벽면을 가득 채운 132장의 샘플 프린트 앞에서 정답을 골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농도와 콘트라스트가 미세하게 조절된 샘플 프린트에서 그 차이를 구별하고, 정답을 골라내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까다로운 객관식 문항처럼 보면 볼수록 헷갈리기만 하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글_박지수 기자


 

 


한남동의 램프랩에서 지난 5월 전시를 열었던 <유철수의 좋은 프린트>는 ‘좋은 프린트’에 관한 정답을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임응식, 최민식, 김기찬 등 국내의 굵직한 사진가들의 전시 작품과 주요 미술관의 영구소장용 작품의 인화를 도맡아 하는 프린트 마스터 ‘유철수’이기에 족집게 과외 같은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정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안겨주기로 작정한 것 같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다채로운 프린트들을 볼 수 있다. 흑백 은염 인화Gelatin silver print 방식으로 제작된 시인 박노해의 작품과 ‘골목 안 풍경’으로 잘 알려진 고 김기찬의 작품 그리고 백금 인화Platinum print 방식을 따른 양현모의 포트레이트를 연이어 만날 수 있다. 또한 검 프린트Gum bichromate print로 제작된 사진들과 여러 다양한 인화지를 사용한 사진들 그리고 김기찬 작품의 샘플 프린트 132장까지 확인할 수 있다.


 

톤 조절이 필요한 부분을 꼼꼼하게 메모한 작업계획표Worksheet. 작품 프린트 1장을 완성하기 위해 적어도 10회 이상 톤을 조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과보다는 과정


박노해와 김기찬의 작품들은 같은 방식으로 인화되었지만 톤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촬영자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빛과 어둠이 강하게 표현된 박노해의 작품과 중간톤의 디테일을 살려 보다 객관적인 느낌으로 표현된 김기찬의 작품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프린트냐고 은근슬쩍 물어보는 듯하다. 각각 유려한 톤과 다채로운 색을 보여주는 백금 인화와 검 프린트는 ‘아날로그 방식은 단조롭다’는 편견을 향해 ‘아직 쓸만하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작가에게 촬영되었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외관상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들 작품들 사이에서 ‘좋은 프린트’의 속성이나 공식 등을 도출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철수가 세 작업을 ‘좋은 프린트’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이유에는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울 중림동, 1988, gelatin silver print, 35×52.5cm ⓒ김기찬

 


이미지를 향한 대화


‘좋은 프린트’라면 풍부한 톤과 계조, 적당한 농도 등을 갖춰야 하는 것은 기본이며, 객관적인 수치와 데이터를 통해 일관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프린트 마스터로서 유철수에게 데이터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작가와의 협업 과정이다. 작가의 생각과 감성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인 프린트는 단순히 적정톤, 즉 객관적인 수치와 데이터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 지나치게 어둡거나 밝고, 콘트라스트가 강하거나 단순한 계조가 관객에게 더 많은 이야기와 정서를 환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의 작품과 김기찬의 작품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 프린트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2장의 샘플 프린트 중에서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다. 결국 132장의 샘플 프린트는 결과(정답)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서,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끊임없이 시도한 이미지에 관한 대화와 해석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무가 있는 집, Ancasi, Cusco, Peru, 2010, gelatin silver print, 35×52.5cm ⓒ박노해

 


전시를 보며 좋은 프린트를 골라내려는 시도는 결국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내가 골라내고 싶었던 ‘Best One’은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지닌 프린트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들, 예를 들어 ‘절대적인 적정톤’이라든지, ‘아날로그는 단조롭고 디지털은 깊이가 없다’는 식의 생각들을 스스로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유철수가 제시한 ‘좋은 프린트’는 작품마다의 적정톤이 다르며, 그것은 마치 기본 레시피는 지키면서도 먹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간을 달리 하는 요리사의 세심함을 닮아있다. 한편 그가 보여주는 수많은 샘플링 프린트와 다채로운 프린트 프로세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비교 우위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프린트라고 여겼던 검 프린트나 백금 인화도 이제는 디지털 스캔으로 네거티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 더욱 무색해지기 때문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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